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가디슈 전투 (문단 편집) === 희망 회복 작전 === 여하튼 앞서 언급한대로 1992년 12월 9일, UN의 물자수송로 안전 확보, 식량 배급을 담당하는 군대와 배급을 받는 민간인의 안전 확보, '''상황발생시 교전''' 임무를 띠고 미 해병대 1800명[* 여기에 당시 투입된 해병대 병력은 제15해병원정단, 제7해병연대와 제11해병연대 각각 1개 대대였다.]이 선봉대로 모가디슈 인근 해안에 상륙했다. 그러니까 '''전투부대'''가 투입되었다는 얘기다. 걸프전 이후 미국의 두 번째 전투부대 투입이라는 특종이었던 까닭에 인근 국가는 물론 소말리아 인근 국가에서 활동하는 미 방송국 소속 특파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와 생중계로 해병대 상륙을 보도했고, 해병대의 상륙이 미국에 생중계되는 황당한 일도 발생했다. 긴장한 상태로 상륙하는 해병대원들을 미리 대기하고 있던 CNN을 포함한 기자들이 카메라 조명과 플래시로 맞이하는 굉장히 엽기적인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파라 아이디드를 비롯해 USC의 세력들이 생중계를 안 봤을 리가 없다. 이 병력이 모가디슈 공항을 인수[* 이걸 점령이라고 하는데 원래 모가디슈 공항은 아이디드의 요구사항에도 나오는 것처럼 UN군 영향하에 있었다. 영화상에서 나오는 미군 본부가 바로 모가디슈 공항이며, 해병대가 철수하면서 인수했다.]한 뒤에는 제3강습상륙대대, 제10산악사단[* 영화 블랙호크 다운에서 종종 '10번째 산'이라고 자막에 나오는 게 바로 제10산악사단을 오역한 것이다.] 등이 추가로 투입된다. 결국 1993년 3월까지 파병 미군은 25,000명으로 증가된다. 이것을 '희망회복작전'이라고 부른다. 미군의 진주로 소말리아의 상황은 급격히 안정되기 시작한다. 사실 미군에 잘못 걸리면 엿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알리 마흐디와 파라 아이디드가 '''미군 해병대 선봉이 상륙한 지 3일만에 휴전협정을 체결'''한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1993년 1월에는 UN의 제안으로 소말리아 평화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 USC 핵심세력들이 참석해 내전 조기종식 회의를 진행했다. 하지만 "'''UN이 소말리아에 간섭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평화유지군의 무장해제 및 철수를 요구한다'''"며 평화유지군의 무장해제 요구를 파라 아이디드가 거절했다. 그래도 미군 덕택에 식량배급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으면서 내전도 소강에 접어든 것은 사실이었다. 식량 배급 차량이 지나는 길목마다 [[장갑차]]가 배치돼 무장세력의 공격을 사전에 봉쇄했고, 더 위험한 곳에는 [[전차]]와 [[공격 헬리콥터]]가 동시에 투입되는 등 안전확보에 대단히 공격적으로 나섰다. 모가디슈 시내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무장세력의 무기를 압수하고, 소규모 교전으로 무장 세력을 해산시키는 등(부상자가 발생했지만 전사자는 없었다) 미군의 적극성 덕택에 민간인들은 드디어 평화가 찾아온다는 희망에 젖었다. 그리고 소말리아 내 친미 세력이 '''잠깐이나마''' 흥하기도 했다. '''그렇게 미군의 활약이 잠깐이나마 흥했다. 잠깐이나마...'''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